紙散Jisan

기록으로 지식을 세상에 퍼뜨리는 사람 — 구요한의 저자 블로그

2025년 회고 — 174번의 강단, 1번의 응급실, 그리고 하나의 질문

빈 무대 위의 지휘자 — 악보가 노드와 연결로 변하는 순간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

174번.

올해 내가 강단에 선 횟수다. 단순 계산으로 이틀에 한 번꼴. SK그룹, 유한양행, LG인화원, 삼성전자, 서울대, KAIST, POSTECH... 이름만 나열해도 숨이 찬다. 111개의 미팅 노트, 74개의 데일리 노트, 4,650개 이상의 수정된 파일. 옵시디언이 기록한 나의 2025년은 숫자로 가득하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이 숫자들은 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바쁘게 살았다는 것? 열심히 일했다는 것? 아니면 그저 정신없이 휘둘렸다는 것?

숫자는 양을 말해주지만 의미는 말해주지 않는다. 174번의 강의가 1번의 깨달음만 못할 수도 있고, 1번의 응급실 방문이 174번의 강의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2025년을 회고하며 나는 숫자 너머의 것을 찾아보려 한다.

응급실에서 만난 과거의 나

9월 23일 새벽. 오른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영등포병원 응급실에 누웠다. 요로결석. 4년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또 시작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든 감정은 공포가 아니었다. 안도감이었다.

"선생님, 제 옵시디언에 건강 기록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2019년 결석 치료 이력, 수면무호흡 진단 기록, 현재 복용 중인 약물 목록을 보여드렸다. 크레아티닌 수치가 1.4로 정상치를 넘겼지만, 과거 데이터와 비교할 수 있었기에 의료진도 나도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식관리는 취미가 아니라 생존 도구였다.

수천 개의 노트를 정리하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과거의 내가 기록해둔 정보가 현재의 나를 살리고 있었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했던 말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순간.

건강 기록만이 아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이런 것들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위기의 순간에 길을 잃는다.

응급실에서 나는 과거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이 나를 구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의 진짜 의미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은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너무 많이 들어서 진짜 의미가 희석됐다. 하지만 174번의 강단에 서면서 이 말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11월, 차의과학대학교 AI헬스케어 세미나. 준비를 하다가 막혔다. "AI 시대에 기록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PPT에 적어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안다. 생성형 AI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기록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 하지만 그걸 설명하려니 말이 꼬였다.

왜?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의는 거울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사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거울. 청중 앞에서 "여러분, 메타데이터가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내 노트의 메타데이터는 엉망인 날도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나를 고쳤다.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내 노트를 열어 수정했다. 청중에게 했던 말을 나에게 적용했다. 174번의 강의는 174번의 자기 검증이었다. 책 백 권을 읽는 것보다 한 번의 강의가 더 많이 가르쳐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명할 수 없으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질문받는 자리에 서야 비로소 진짜 전문가가 된다.


솔로에서 오케스트라로

올해의 가장 큰 변화는 규모였다. 1인 컨설턴트에서 기업 변혁 파트너로.

유한양행 AX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9월 17일 킥오프 미팅. 조직 전체의 AI 전환을 설계하는 자리였다. SK그룹에서 2년간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4단계 프레임워크를 제안했다.

1단계: 조직 리터러시 (VOD + 집합교육) 2단계: 5일 집중 코호트 (반복/자동화/RAG 챗봇/대시보드) 3단계: 부서별 커스터마이징 (구매, HR, 규제) 4단계: 문화 내재화 (성과평가에 AI 활용 반영)

혼자 강의하는 것과 조직을 바꾸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었다. 나 혼자 잘해서는 안 되고, 시스템이 일하게 해야 했다.

10월, 커맨드스페이스가 법인으로 전환됐다. 4년간의 1인 기업이 끝났다. 세무사님, 법무사님과 서류를 정리하며 깨달았다. 회사를 만든다는 건 내 이름 대신 구조가 일하게 하는 것이었다.

더메디컬 프로젝트도 같은 맥락이다. AI 기반 의료 콘텐츠 자동화 시스템. 버튼 하나로 의료 뉴스가 수집되고, 다국어 TTS로 음성이 생성되고, 영상이 만들어진다. 물론 검수는 필요하지만, 0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자동화는 게으름이 아니다.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한 환경 설계다.

솔로 연주자는 혼자 빛난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다른 사람들이 빛나게 한다. 2025년은 그 전환의 해였다.


무대 위의 AI, 무대 위의 나

12월 31일. 서울콘 DDP. "유랑, 경계, 즉흥"이라는 제목의 40분짜리 퍼포먼스.

바이올리니스트 KoN, AI 시스템 Dr. POPO와 함께 무대에 섰다. Blue Bossa를 스캣하는 동안 AI가 생성한 영상이 뒤에서 흐르고 있었다. 헝가리안 댄스, 리베르탱고, Going Together... 사람의 즉흥과 기계의 생성이 뒤섞이는 경험.

공연을 준비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재즈와 지식관리는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테마 → 변주 → 반응 → 회수.

재즈 스탠다드를 연주할 때 멜로디를 그대로 치지 않는다. 테마를 잡고, 변주하고, 청중과 밴드의 반응을 읽고, 다시 테마로 돌아온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핵심 개념을 잡고, 맥락에 맞게 변형하고, 피드백을 받고, 정제된 형태로 돌아온다.

AI는 대체재가 아니라 협연자였다. 사고 보조자(Cognitive Co-pilot). Claude로 강의 스크립트를 다듬고, Suno로 백트랙을 만들고, n8n으로 반복 업무를 자동화했다.

무대 위에서 AI와 함께 즉흥 연주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1년간 찾던 답인가. AI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AI가 못하는 것.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

재즈 즉흥 연주처럼.


저장에서 검색으로

경남 CMDS AI PKM 컨퍼런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옵시디언은 노트 앱이 아닙니다. 개인 지식 그래프 엔진입니다."

청중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이 원하는 건 더 예쁜 정리법이 아니었다. 더 빠른 인출법이었다.

올해 가장 많이 한 생각.

"정리를 잘했는가?"가 아니라 "다시 꺼내 쓸 수 있는가?"

4,650개의 파일을 수정하면서 깨달았다. 메타데이터, 태그, 링크는 장식이 아니라 인출 인터페이스였다. 예쁘게 정리하는 것보다 빠르게 찾는 것이 중요했다.

응급실에서 건강 기록을 꺼낼 수 있었던 것도, 강의 준비를 빠르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인출 가능한 형태로 저장해뒀기 때문이다.

2025년의 가장 큰 깨달음.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더 잘 꺼내는 것.


하나의 질문

174번의 강단. 111개의 미팅. 74개의 데일리 노트. 그리고 1번의 응급실.

이 숫자들 사이에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발견했다.

"지금 내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래의 나에게 친절한가?"

강의를 준비하며 물었다. 이 PPT가 6개월 뒤의 나에게 도움이 될까? 응급실에서 물었다. 과거의 기록이 지금의 나를 살릴 수 있을까? 무대 위에서 물었다. 이 즉흥 연주가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이 있을까?

결국 모든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시간을 초월해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가.


2026년을 향해

새해가 밝으면 또 강단에 설 것이다. 또 미팅을 하고, 노트를 쓰고, 파일을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방향은 달라져야 한다.

더 배우기 → ❌ 더 잘 꺼내 쓰기 → ⭕

개인 성취 → ⬇️ 타인의 성장을 돕는 구조 → ⬆️

솔로 연주 → ⬇️ 오케스트라 지휘 → ⬆️

174번의 강의가 가르쳐준 것. 설명할 수 없으면 아는 것이 아니다. 1번의 응급실이 가르쳐준 것. 기록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다. 40분의 공연이 가르쳐준 것. AI와 함께 춤출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

미래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친절한가?

이 질문을 품고 2026년으로 간다.


당신의 2025년은 어땠는가? 그리고 당신이 발견한 질문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한, 우리는 성장한다. 기록하는 한, 우리의 질문은 영원하다.

이 글을 인용하려면
구요한. (2025). 2025년 회고 — 174번의 강단, 1번의 응급실, 그리고 하나의 질문. 紙散(지산). https://jisan.cmdspace.work/posts/retrospective-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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